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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류

구글 드라이브에 묵혀있던 문서 하나를 찾았다. 그것은 연초에 누군가의 OKR을 보고 꽂혀서 만들어둔 2020년 목표설정표.. 야심차게 세운 꽤 많은 계획이 있었는데 거의 90%를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절반이 기획자로서의 역량 기르기였는데 이건 완전 실패다. 코로나, 재택,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업무에 투입되면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천장보고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만큼 그 시간을 활용해 생산성있는 일을 하겠지, 그 반대였다. 그래서 그러지 않는 게 2021년의 가장 큰 목표다. 당분간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날들일 것 같으니까 무기력에 지지않기. 당장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조바심 내지 않기.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을 뿐 내게 2020년은 꽤나 다이나믹했다. 

 

유례없는 전염병 속 우리집은 리모델링을 했다. 덕분에 엄빠랑 원룸 방 한칸에서 한달을 지내봤다. 이사할 때 출근용 옷을 바리바리 싸왔는데 재택이 길어져 그 사이 회사를 한 번 안가 무용지물이 됐다. 점심에 공적마스크 사러나가면서 마스크 너머로 봄을 느꼈다. 잠깐의 이별도 있었다. 그 날 같이 있어준 친구들한테 무한 감사..

 

마스크가 일상이 된 날들에 전세계적으로 줄어들지 않는 확진자 수, 이게 여름까지 가면 더워서 마스크를 어떻게 낄까 싶었는데 정신차려보니 초여름이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는 원격근무제를 도입했다.

 

올 여름은 장마가 정말 길었다. 지난 해에도 비가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정말 매일 많이도 왔다. 비가 그치고 나니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8월 생일엔 마스크를 끼고 바다를 보러갔었다. 밖이 한창 불안하고 우울한 시기였다. 집에만 있다가 뜬금없이 발을 다쳤다. 내 인생에 골절이라니. 그것도 집에서? 보험 들어두길 참 잘했다 생각했었다.

 

9월부터 시작된 정신없는 날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원래 12월이면 끝나는 프로젝트였는데 기간이 연장돼 두달은 더 고생하겠지만.. 쨌든 그 4개월 동안 많은게 변했다. 내가 이렇게 감정에 많이 휘둘리는 사람이구나를 알았고, 끓어오르는 화를 못 참을때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한가지를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오만하지 않기. 맡은 일은 아주 개인적이었던 그동안의 업무 범위를 훌쩍 벗어나 지금껏 해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다. 다행이다 싶은 한가지는 이건 원래 내가 하던 일이 아닌데,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하나 싶을 때도 많았지만 (지금도) 이 업무에 투입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제자리였을거라는거 그거 하난 분명하다. 사원 나부랭이가 그 사이에서 1인 이상의 몫은 톡톡이 해내고 있는 것 같아 그건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돌아보면 다 경험이겠지? 참, 전화울렁증을 완전 극복했다.

 

가을엔 내 소중한 중학교 친구가 결혼을 했고, 나는 8년 장롱면허 끝에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 아직 주차는 빵점인데 그래도 조금씩 늘고있다. 여행은 뭐.. 이럴 줄 알았으면 1월에 모든 휴가를 몰빵하고 어디든 다녀올걸. 하긴 이럴줄 아무도 몰랐겠지. 그리고 목표했던 자격증은 하나 땄다. 독서는 올해 목표 30권이었는데 반은 읽었나.. 운동은.. 요가를 그만두고 나서 뿌듯할 정도로 홈트를 꾸준히 했는데 발 다치고 나서부터 도루묵이다. 새해엔 다시 운동하기. 여튼 그런 한 해였다. 

 

사실 29살이 된다하니 아차싶은 맘이 잠시 들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많게 느껴진다기보다 혹 내가 목표한 길을 가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리면 어쩌지 그런 맘들이다. 그래서 남은 20대의 그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좀 더 노력해보려고 한다. 그 덕에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일석이조겠지. 새해엔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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