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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류


​2017.06.03 까미노 데 산티아고 24일차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오늘은 산을 타야할 뿐만아니라 오늘의 목적지인 산 정상의 오 세브레이로에는 공립 알베르게 하나에 베드가 104개 정도여서 좀 서둘렀다. 짐을 챙겨 내려와 같은 방의 크리스가 먼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인사하고, 나는 어제 사둔 요거트와 사과를 먹고 출발했다. 처음 걷기 시작할 땐 너무 어두워서 길을 잃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은지언니와 발걸음이 맞아서 처음 만난 마을에서 함께 아침을 먹었다. 이건 감사하게도 언니가 사주셨다. 크로와상 하나랑 단톡방에서 봤던 주문법을 책 읽듯 또박또박 읽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시켜먹어 봤다. 유럽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음료는 따로 없다보니 뜨거운 아메리카노랑 얼음잔이 함께 나왔다. 아침을 다 먹고 다시 걷는데 은지언니랑 한참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은지언니는 사실 폰세바돈 알베르게에서부터 봤는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은지언니와는 9살 차이가 나지만 역시 까미노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싶을 정도로 편하게 대화했던 것 같다.



앞서 걷는 은지언니의 뒷모습​



산티아고까지 200km도 안남았단다.

언니와는 중간에 헤어졌고, 다시 혼자 걷게 되었다.


계속 걸었다. 숲을 따라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정말 길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지나치는 작은 마을도 많았고, 날은 흐렸지만 전에 걷던 길과는 새삼 다른 모습의 자연에 지루하지 않았고 때론 넋을 놓고 걸었다. 한국의 강원도 생각이 나기도 했다.



바에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걷다가 본격적으로 산타기 바로 전 마을인 Ruitelan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던 바에 들어가 또르띠아와 토마토, 빵이 함께 나오던 메뉴, 그리고 오렌지주스를 시켜 먹었다. 혼자 온 나에게도 친절함을 보여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먹고 쉬다가 화장실도 다녀온 다음 짐을 챙겨 일어났다.


몰랐는데 입간판에 한국어가 있었구낰ㅋㅋㅋ


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10키로, 오르막이 계속 됐다. 고지대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조금 가파른편이었고, 8kg 정도의 배낭을 매고 그 길을 오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혼자 걷는 마당에 쉴 곳도 없으니 등산스틱에 무게를 분산해가며 성큼성큼 올라갔더니 얼굴에 열올라서 터질뻔했다,, 고도가 높아질 수록 안개가 짙어지고, 안개비가 미스트마냥 계속 내려 얼굴에 달아오른 열을 그나마 식혀주었다. 날씨가 흐려서 좀 아쉽기도 했지만, 덥지 않아 더 좋았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5키로를 남겨두고 오 세브레이로 전 마을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비 미스트 맞으며 물 벌컥벌컥 마시고, 남은 복숭아와 씨리얼바 하나 까먹은 다음 다시 올라갔다.


드디어 갈리시아 지역에 왔다.



갈리시아 지역 부터는 표시석에 남은 km가 함께 표기된다. ​산티아고까지 160km. 

점점 줄어드는 숫자를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오 세브레이로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온 메긴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서로 이름 알려주는데 메긴이라길래 너 혹시 크리스 친구야? 했더니 맞단다ㅋㅋㅋㅋ 어제 묵었던 알베르게의 빈 침대가 이 사람거였다. 여튼 걸으면서 컨디션 좀 괜찮냐 묻길래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들다고 말해줬다. 자기도 넘 힘들다고 했다. 얼마 안남았으니 힘내자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마을까지 같이 걸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바람이 엄청 불었고, 걷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체온이 떨어지면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현중이는 이미 와있었고 은지언니는 나 도착하고 곧 오셨다. 알베르게는 1시 오픈이었는데 12시 50분쯤 안돼서 도착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30분을 기다려서야 알베르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뭔가 좋아보였는데 생각보다 좋진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샤워하고,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샤워실이 칸막이로만 되어 있고 문이 따로 없어서 좀 당황했다.) 엄마랑 통화도 했다. 날씨가 이러니 뭘 할 수가 없어서 침대에 누워 앞으로 여행 계획도 짜고 쉬다가 은지언니랑 현중이랑 셋이 저녁을먹으러 가기로 했다. 만만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 

슈퍼, 성당, 저녁 모두 한번에 해결하려고 판초 뒤집어 쓰고 반바지 맨발에 쓰레빠로 마을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성당에 들어가 혼자 잠시 기도하고 나왔다.

특히나 이모부를 위해.. 꼭 건강해지셔서 여기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은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했다. 역시 나와 현중이가 한참 순례자 메뉴 사먹는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던 때 였지만, 정말 딱히 먹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한 레스토랑에 들어왔고, 종업원 아저씨가 한국 음식하고 비슷한 게 있다고 하면서 추천해주셔서 그걸로 골랐는데 웬 시래기국 닭볶음같은게 나와서 배부르게 잘 먹었다.



은지언니가 먹어보라고 뽈뽀도 시켜주셔서 까미노 길에서 처음으로 먹어봤다. 마시썽...



후식 디져트까지 ! 그리고 계산하고 나가려는데 언니가 현중이랑 내 몫까지 다 계산해주셨다. 넘 감사하지만 죄송해서 마다했는데 은지언니가 말하길 나도 언니들하고 다니면서 많이 얻어먹었고, 너네도 여유가 생겼을 때 또 다른사람에게 오늘같이 베풀면 된다고 하셨다. 진짜 길에서 많이 배운다. 

ㅠㅠ…..헹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작은 슈퍼에서 내일 간단히 먹을걸 샀다. 슈퍼에서 크리스 만났는데 오마이갓 데이나 바지가 왜그래 넘 춥겠다 이럼ㅋㅋㅋㅋㅋㅋ

내일은 날씨가 좀 좋아지길 바라며 잠자리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