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4 까미노 데 산티아고 4일차 :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용서의 언덕을 가다
홀로 배낭을 매고 한국을 떠나 유럽에 온지 10일째, 오늘 걷는 것까지 합하면 내가 걸어온 길이 벌써 100km를 넘긴다. 새삼 시간이 빠른 것 같기도, 언제 도착하려나 싶기도 하다. 우리언니가 더 이상 걷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까미노를 포기하고 크렉과 함께 팜플로냐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이 길에 오면서 처음 만난 친구들이기에 아쉬움 가득하게 인사를 했다.
지은언니와 둘이 출발하게 된 오늘. 역시 해가 뜨기 전 출발했다. 팜플로냐에서 나가는 길이 헷갈린다기에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걷고 걸었다. 도시외곽의 팜플로냐 대학을 지나 또 다시 차도, 인적도 드문 길이 나오면 온전히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우리는 서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한참을 걸었다.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스페인은 한국과 달리 공기가 건조해서 햇볕은 따갑지만 그늘에서는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선선하다.
급경사를 숨죽여 오르고 나니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도착해 '이제 좀 걷는 것이 익숙해졌나보다' 생각했다. 사진으로만 봤던 곳,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떠올렸다. 나는 살면서 '용서'를 똑바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도 모두 나의 몫임에도 모든 상황에서 나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너무나 절묘한,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그 상황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모두 나를 위한 합리화의 과정인것처럼
푸드트럭도 있고
출발은 따로 했지만 길에서 다시 만난 진님이 사진도 찍어주셨다! 몇 없는 내 전신사진이다 큭큭
가만히 앉아 쉬다보니 많은 순례자가 용서의 언덕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내려간다. 우리도 이제 출발해야지, 하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사진 찍어줄까? 하며 카메라를 들었더니 얼굴 가리고 머쓱해하는 지은언니
가파르고 방치된 비포장도로스러운 다운힐을 지나(내려오는데 힘들어서 또 사진이 없음ㅋ..) 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을 따라 걸었다. 불긋불긋 보이는 양귀비꽃도. 아빠가 양귀비 꽃 사진을 참 많이 찍었었는데 하곤 아빠가 보고싶어졌다.
저기 suru라고 쓰여있는 돌단에 앉아 쪼꼬레 먹으면서 쉬다가 걸었다. 사진이라 잘 안보이지만 무슨 민들레 홀씨같은 것들이 눈처럼 많이 날리던 곳이었다. 너무 많이 날려 우리나라 송화가루 쌓이듯 바닥에 쌓여있기도 했다. 그래도 반짝이며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멍하니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이제 걷는게 괜찮아지나보다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바람도, 오르막도 아닌 강렬한 태양에 지쳐 오르테가를 지나면서부터는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목적지 바로 전 마을에서 레몬주스 마시면서 3km를 더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절망 반 희망 반이었지만 특히나 정말루 힘들었던 오늘..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하고도 어느 알베르게에 묵어야 할지 고민하다 배도 고픈데 거의 한시간은 헤맸다. 걷다보니 마을 끝까지 와버렸기 때문이었따. 지나가던 외국인 순례자들이 다리 지나 알베르게가 있다고 알려줘서 일단 점심부터 먹고 가보기로 하자하고 6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를 처음 먹었다. 맛은 없었음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스페인어로 '여왕의 다리'라는 뜻이란다. 우리는 마을 끝에 위치한 이 다리를 건너 (^^)겆이같은 언덕!언덕!언덕!!!!!!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Santiago Apostol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 정말 어쩌다보니 오게 된 상황인데다가 우리 제외 한국인도 없고 그냥 사람이 별루 없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용서의 언덕에서 전단지로 알베 홍보하던 곳이 바로 요기였음ㅋㅋ 언덕땸시 마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올 엄두도 안남..ㅋ 방보다는 복도에서 자는 기분이었지만 근데 그냥 넓고 깔끔한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여튼 나는 한국에서 달고 온 감기가 런던을 거쳐 다시 심해져 약을 먹고있고, 아직까지 다리는 괜찮은데 어깨가 말썽이라 앞으로 어떨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가방을 잘못된 방법으로 메고 있는건지 어깨가 많이 아팠다. 가방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볼까 해서 크림만 냄기고 스킨, 로션, 면세로 산 썬구리케이스까지 다 버렸다. 진짜 고민했는데 고데기랑 비비크림은 버릴 수가 없었다..ㅠ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주 잘했다
마을이 작아 마트같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괜찮은 식료품가게를 찾았다. 천도복숭아 2알, 바나나 1개를 샀고 물은 사둔걸 먹기로. 그리고 지은언니랑 저녁으로 밥먹을 곳을 찾아 헤메다 들어간 곳에서 먹물빠에야와 하와이안피자를 먹었다. 파는 가게는 많이 봤는데 처음 먹음ㅎㅎ! 좀 짜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늘 마을에 도착해 알베르게 찾는게 너무 힘들었던지라, 내일은 좀 미리 알아보고 중간에 밥도 든든히 먹으며 쉬어야겠다. 사진은 언니랑 내려와서 먹은 저녁!
저녁 9시가 다되가는데 밝다... 늦게나마 손빨래해서 일단 널었는데, 해가 지면서 그늘이 져 빨래가 도통 마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데 뭐 별 수 있나용. 진님이 우리 만나러 올라오셨었는데 빨래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다 하고 나와보니 결국 그냥 내려가셨단다. 또륵,, 진님은 공립 알베르게에서, 안면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룽지지 먹었다고 자랑하셔서 쫌 부러웠음
여튼, 언니랑 둘이 맥주 한 잔 하면서 일기장에 오늘 하루를 적었다. 지도를 보고 앞으로 날마다 얼마나 걸어야할지 계획도 짜보았다.
맥주도 오늘의 밤도 정말 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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