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page 31

류류



2017.05.28  까미노 데 산티아고 18일차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Mansilla de las Mulas)


사실 5시 좀 넘어서 잠에서 깼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이라더니, 요즘 칼같이 5시 또는 5시 반에 일어난 탓에 눈이 떠졌다. 하지만 어제 밤 다같이 6시 이전에 일어나지 말자고 약속했기에 6시까지 누워있었다. 6시가 되자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지은언니를 깨우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짐을 챙겨 1층 식당으로 내려와보니 아침이 준비되고 있었다. 역시 도나티보로 제공되는 우유와 쥬스, 빵 등을 먹고 각자 먹은 설거지를 하고 나왔다. 쓰다가 생각났는데 내가 먹은거 아닌데 마치 내가 먹고 안치운듯 남의 그릇도 설거지하고 가라고 해서 어쩔스없이 함...ㅠ억울 그래도 든든히 먹었다!  그 와중에 진님이 안보여서 먼저 출발하셨나했는데  우리가 먼저 출발한 줄 아시곤 먼저 걷기 시작하셨단다.  

나는 너무 부어버린 발목 때문에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고 가방에 봉투를 달아 리셉션 근처에 뒀다. 알베르게 입구 벤치에 앉아 언니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큰 개 두 마리가 알베르게를 바라보며 얌전히 앉아있었다. 개들이 그렇게 서있으니 사람들이 아침마다 조식으로 나오는 빵을 먹으라고 던져줘서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여하튼 간만에 아침도 든든하게 먹고, 느지막이 출발하고 보니 7시가 넘었다. 



한 7km 정도를 걷고 첫 마을인 엘 부르고에 도착했다. 사실 이때 진님을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ㅋㅋㅋ 진님이 알려주신 바로는 이 마을부터 건축양식이 조금 다른 모습을 띤다고 한다. 확실히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훨씬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탓에 딱히 쉬어가진 않고 물 한병을 샀다. 물론 그 다음까지 10km 정도 마을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은 때였다....ㅎㅎ

아무래도 각자의 페이스에 맞게 걷다보니 진님 - 현중이 - 가방을 메지 않은 나 - 지은언니 순으로 걷게 되었다. 현중이까지는 보였는데 오늘따라 현중이 컨디션이 엄청 좋았던지 진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각자 조금씩 떨어지면서 혼자 걷게 되었다. 사진을 왜 이렇게 안찍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쉴 마을이 없는 줄 몰랐던 10km를 걸으며 배고프고 힘들어질 때 겨우 렐리에고스에 도착했다. (그때는 레리고스라고 불렀었는데 렐리에고스였다.) 진짜 오아시스 같았던 마을이었다. 왠지 마을 초입에 있던 바는 사람도 많고 땡기지 않아서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보니 마침 현중이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맛있다기에 얼른 가방 내려놓고 샌드위치랑 망고주스를 시켰다. 걔가 거의 다먹을 때쯤 내가 도착한 탓에 현중이는 먼저 떠났고, 그 뒤에 지은언니가 왔다 ㅋㅋㅋ 나는 지은언니가 시킨 음식을 다 먹을때까지 쉬고 언니랑 같이 출발했다. 

그렇게 도착한 만시야! ​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동키 보낸 내 가방이 오지 않는다  . . . 



생각해보니 지난밤에 꿈을 꿨다. 누군가 내 배낭의 조개껍데기를 훔쳐 달아나는 꿈이었는데 . . 그게 나였나 보다. 내 배낭이 오지 않았다. 미리 예약을 해야 한댄다. 오마이갓 . . . 짜증도 나고 아픈 것도 서럽고 가방이 없다는 것 자체가 멘붕이어서 눈물이 났다. 근데 지은언니도 그렇고 호스피딸로분이 그런 날 보고 걱정 말라고 돈크라이 돈워리 해주면서 뭐 필요하냐고 옷이며 수건 양치도구 클렌징폼까지 싹 빌려주셨다. 진짜루 감동이었다..ㅠㅠㅠㅠ 까미노를 걷다 어려움을 만날 때면 꼭 천사가 나타나 도와준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화로 침착하게 해결해 준 지은언니도 너무너무 고마웠다. 가방은 내일 다음 목적지인 레온까지 보내준다고 했다. 나 혼자 있었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전마을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 그 자체 . . . 



현중이가 누나 기분도 꿀꿀한데 저녁은 맛있는거 사먹자고 했다. 그래서 지은언니랑 셋이 저녁먹으러 나왔는데

로컬맛집 가려고 알아봤지만 저녁 8시에 열 뿐더러 너무 비싸소 그냥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바에 갔는데 겁나 짰다. . . .



무튼 내 가방이 없어 문제지만 만시야는 좋은 마을 같다. 분위기도 그렇고 뭔가 일요일이라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이 여유로움이 좋다. 사실 요즘 지나는 마을들은 약간 공사판이나 폐허같은 느낌이 있어서 더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밑에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올라온다. 킁킁 . . 배낭이 없어 제일 불편한건 충전기와 렌즈... 그리고 Dia가 문을 닫아 알베르게와 같은 골목에 있는 슈퍼를 갔는데 무지 쌌다. 짱 좋다.

기억 나는건,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골목 한바퀴 돌고나서 깜빡 했던 물사러 다시 갔는데 그새 가게가 문을 닫고 있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사긴 했는데 가게 닫기 1분전이래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겼음ㅋㅋㅋㅋㅋㅋ 

날 도와주신 호스피딸로분께 고맙다는 편지를 썼다. 한국말로, 영어로, 그리고 스페인어로 같은 내용을 3번 적었다. 우리말로도 스페인어로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번역기를 돌린 탓에 해석이 이상할 수 있으니 영어로도 적었다. 뮤즐리바 하나와 쪽지를 쭈뼛쭈뼛 전해드렸더니 다시 한번 괜찮다며 크게 팔벌려 안아주셨다. 

삐걱거리던 만시야의 무니시팔에서, 창문너머 마당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누웠다.



- 오늘은 한 26km를 걷는데 메세타의 직선거리가 넘넘 지겨웠다. 그나마 오늘도 좀 흐려서 뙤약볕이 아니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 납작 복숭아 철이라더니 이제 슈퍼나 과일가게에서 잘 보인다. 완전 맛남

- 와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레온에 간다. 2/3지점이라는 레온! 부르고스에서 딱 1주일 걸렸다. 이제 며칠 남았는가.. 시간 진짜 빠르다.

- 진님은 오늘 레온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디서 멈췄냐고 물어보시길래 만시야라고 했더니 이미 지나셨다고 . . .  그래서 레온까지 가셨단다. 레온에 가있던 우리언니가 말해주길 저녁 6시쯤 도착하셨다몈ㅋㅋㅋ 44km를 짐들고.. 대단.. 내가 보고싶어했던 아주머님도 스테파노 마오루 모두 레온이다. (그리고 진님과는 산티아고에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 .)